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2024. 3. 17. 00:4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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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했던 와우시민아파트 19개동 중 1개동(15동)이 붕괴된 사고이다.


당시 서울은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급증했지만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서울시민들은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에서 지내게 되었고 이는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부실 공사
이런 상황에서 1966년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때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하꼬방)이 TV를 통해 미국에 생중계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박정희 정부는 당연히 상황을 좋지 않게 여겨 판자촌을 정리하라고 명령했으며 김현옥 당시 서울특별시장 지시하에, 각 구청들은 판자촌 등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건설된 시민 아파트 중에 바로 이 와우 아파트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판자촌이 있던 곳에 아파트를 지었으니 대부분 위치는 산 가장자리였다.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김현옥 시장이 한 "야 이 X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라는 말이 유명하다. 물론 단순히 그러한 이유에서 산자락에 지은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을 만한 평지는 당연히 지가가 비싼 탓에 예산이 부족하여 국유지인 산 가장자리에 건설을 하게 된 것이었다. 와우 아파트 위치는 현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 자락에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데다 원가도 턱없이 낮았다. 그 당시의 서울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단가에 입찰하게 하고 거부하면 이후 관급공사에서 불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당연하게도 날림 중의 날림 건축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소련이나 중국, 북한, 동독,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프랑스 등에서 단 몇주~몇개월안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쪽은 조립식 건축이라 주요 자재들을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수십년은 넘게 버틸 수준은 되었고,[2] 한국은 그런 기술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



와우 아파트는 건설업체 몇 곳이 나누어 지었는데 그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자신들이 지어야 할 부분을 박영배라는 토건업자에게 하청으로 맡겼는데 이 사람은 무면허 업자였다!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 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금액이 부족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 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신진 코로나나 현대 코티나 같은 자동차가 100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고작 몇 억 주고 아파트 단지를 지으라는 셈, 더 와닿게 비유하자면 다 떼먹고나서 제네시스 G90 10대 남짓되는 살 수 있는 돈으로 땅만 던져주고 아파트 한 동을 지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시민아파트의 기본설계도 문제였다. 당시 서울시는 기존에 거주하는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1㎡당 280kg 정도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브로커들이 개입하여 입주권 가격을 크게 올린 탓에 막상 진짜 입주대상자였던 빈민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 되어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실제 아파트에 입주한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들이었다.[3]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아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기준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떼먹은 상황에서 업자도 무면허였으니 당연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이 섞인 모래 반죽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 콘크리트를 만들 때 쓰는 물도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래도 설계 예상 하중보다 넉넉하게 목표로 잡은 제대로 된 설계였다면 그래도 900kg까지는 버틸 콘크리트 구조물이었으나 재료 장난질으로 인해 초기 예상 하중인 200kg대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부실한 콘크리트 기둥이 되었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 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으려면 지지하고 고정해줄 수 있는 암반층이 나오거나 고정할 수 있는 공학적 조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파거나 보강해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하거나, 연약 지반이면 전봇대 같은 커다란 콘크리트 말뚝(파일)을 더 안 들어갈 때까지 촘촘히 박는다. 그러고 나서 콘크리트로 토대를 만들고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4]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부실한 아파트가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자인 것이었다.

이런 탓에 튼튼한 암반이 아닌 물렁한 부토 위에 아파트 기둥이 세워졌다. 그나마 겨울에는 땅이 얼어 있어서 간신히 버텼지만 봄이 되고 땅이 녹자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는 추위가 풀리는 봄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으로 봄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난다. 겨울 동안 내린 눈이나 물이 바위나 흙 속으로 들어가 언다. 물이 얼면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바위나 흙을 지면에서 밀어내는데, 봄이 되어 녹으니 땅이 꺼지면서 녹은 물과 함께 그대로 쓸려 내려간다. 봄철에 TV나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에서 해빙기 사고 예방 캠페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멀쩡하게 지은 아파트라면 내구성을 위해서 어느 지형이든지 지반을 튼튼하게 공사한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간 채였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 시점(1970년 4월 8일)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결국 해당 위치에 있던 15동이 산 아래쪽으로 넘어지듯이 무너져 판잣집 세 채를 덮치면서 산산조각났다

이 사고로 70여 명이 매몰당해 와우 아파트 입주민 33명과 잔해에 깔린 판잣집 주민 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된 상태였기에 이 정도였지 만일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다면 사상자가 더욱 크게 늘었을 것이다.

2.4. 결과[편집]

이 사고로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사직했다. 모양새는 사직이었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문제의 하청업자 박영배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이외에도 3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붕괴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하다가 난색을 띄고는 귀국했는데 그 이유가 아파트는 커녕 헛간을 짓기조차도 턱없이 부족한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즉, 건축공학적인 분석과 규명을 하러 왔더니 그냥 집을 짓는 재료가 완전히 두부 수준의 재료였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와 황당함과 기막힘에 치를 떨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 망신 제대로 당한 셈이었다.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



15동 붕괴가 일어난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됐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상당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이라 철거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72년 서울시 항공사진으로 먼저 이 4개 동이 철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 동(1-16, 가-다)이었는데, 남은 15개 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 보강한 후 계속 사람들이 살았다. 1976년과 1984년, 1988년과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한 뒤 남은 터에 공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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