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 16:31ㆍ카테고리 없음
빌리 홀리데이
빌리 홀리데이 노래 부르실 때
미국의 재즈 가수.
새러 본,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재즈 3대 디바로 불린다.
거리의 창녀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어린 나이에 창부의 삶을 살았다.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버림 받았고 어머니는 그녀를 키울 능력이 없어 사촌의 집에 맡겨졌으나 그곳에서 학대받으며 자랐으며, 1929년 클럽에서 인정받는 가수가 되기전까지 2번의 성폭행과 2번의 감옥 생활을 겪었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그녀가 처음 성폭행을 당했을때, 상대는 40대의 백인이었고 그녀는 10살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백인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인 그녀를 불량소녀로 몰아서 감호소에 집어넣었다.[3] 감호소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풀려나온 그녀는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다른 흑인 남자에게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결국 살던 곳에서 나온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할렘 가로 갔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창부의 일뿐이었다. 15살까지 할렘가에서 창부로 일하던 그녀는 성행위를 강요하던 흑인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매춘 행위로 고발되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창부의 생활을 접은 채 백인의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곧 찾아온 미국의 대공황 속에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결국 방세를 갚지 못해서 길거리에 내쫓길뻔한 그녀는 거리의 파즈 앤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의 댄서 오디션을 보러 갔지만, 춤을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오디션에 붙지 못했다. 그걸 가엾게 여긴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가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했고, 빌리 할러데이는 노래를 시작했다.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그 광경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그때 얻은 '빌리 할러데이'라는 이름은 좋아하던 배우 빌리 더브의 빌리와 아버지 클래런스 할러데이의 성 할러데이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버지 클래런스 할러데이는 당시 빅 밴드 플레처 헨더슨 악단의 벤조 연주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처음엔 빌리 할러데이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빌리 할러데이가 명성을 얻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임을 자처하며 돈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그 처참한 인생의 역경 속에서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를 인정 받기 시작했으며, 1933년 당시 스윙의 왕이라 불리던 베니 굿먼, 평론가 존 해먼드와의 만남으로 18세의 나이에 음반을 내고 본격적으로 재즈 가수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팬들이 그녀의 음색에서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것은 말기 감성을 쥐어짜는 그녀의 우울한 감성이지만, 초기에는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와 같은 스윙밴드의 보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런 그녀의 음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은, 1939년 폐렴에 걸렸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부른 기이한 열매(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 영상 # 영상2 # 가사[4]이다. 에이블 미러폴이 가명인 루이스 앨런으로 발표한 이 곡은, 흑인들이 백인에게 폭력을 당한 다음 나무 위에 목이 매달린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5] 이후 이 노래는 여성 작가 릴리언 스미스에 의해 소설로 발표,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으며, 할러데이 역시 이 곡으로 1944년 에스콰이어 재즈보컬상을 수상한다. 이 시기 마약하던 시절의 맬컴 엑스와 친했다는 말이 있다.
1950년에 들어서는 이러한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 이후 금단과 중독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삶의 마지막까지 녹음을 했으며 1959년 5월 맨해튼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진 이후 10주간 입원하다 44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마약와 알코올로 인해 어찌나 몸이 망가졌는지 뉴욕의 메트러팔러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진료 기록에도 ‘병명 : 마약 중독 말기,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적힐 정도였다.
게다가 마약 중독 이후로 목소리가 천천히 망가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수많은 팬들 가운데는 마약에 중독돼서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층 더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흑인으로 태어나 사창가를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고, 남편들도 전부 막장이였으며, 말년엔 약물 중독으로 고생했기에 평생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장례식 때 슬퍼하며 할러데이는 죽어서야 진짜 행복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근데 역설적으로 별명은 "Lady day". 그 별명은 무대 위에서만큼은 언제나 머리에 하얀 치자꽃을 꽂고 정갈하고 품위 있게 노래했던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 되었다.
음악 성향[편집]
초기 음색은 팬들이 기억하는 말년, 즉 그녀가 삶을 마감하면서 부른 음반 Lady in Satin에 비하면 감성을 극으로 쥐어짜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특이한 보컬임에는 분명했다. 그런 그녀에게 훗날 기자들이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에게 묻자, 블루스 싱어인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 외에 별다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은, 그녀의 특이한 목소리는 다분히 천성적인 것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음악적으로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만난 레스터 영과 상성이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할러데이는 그를 향해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약자인 "Pres"라 부르고, 레스터 영은 그녀를 "Lady day"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했다. 실제로 영이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 쿼텟과 함께한 1956년에 발매한 음반명은 Pres and Teddy다.
그녀의 가창력과 정교함은 엘라 피츠제럴드에 비교할 수가 없었으며, 새러 본의 아름답고도 풍부한 음색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여성 재즈 보컬로 꼽히는 이유는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창력과 음색 같은 것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며 혹자는 블루스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라고도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