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0. 02:25ㆍ카테고리 없음
그레타 가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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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와 스웨덴에서 활동한 스웨덴 출신의 배우.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과도기를 이끈 배우로 양쪽 분야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5위에 선정되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네 번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엔 실패했다.
북유럽 출신답게 170cm의 큰 키, 그리고 본인의 얼음같은 매혹적인 미모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배우 루이즈 브룩스[2]는 가르보가 "완벽한 골격, 부드러운 피부, 투명한 눈동자"를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신비한 이미지로 유명하나 이는 소속사였던 MGM이 정성을 들여 조성한 인위적 산물이다. MGM은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웨덴의 스핑크스(Swedish Sphinx)"란 별명을 만들어 널리 퍼트리기까지 했다.
극빈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가르보는 어린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환경 탓인지 어려서부터 물질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무런 기술을 갖추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로 주로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퍼내곤 했는데, 가르보는 이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했지만 지나친 노동의 여파로 앓기 시작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13살 때 학교를 그만뒀다. 결국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계를 부양하기 위해 스톡홀름의 이발관에서 면도사 일을 시작했다. 직장은 다시 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외모가 눈에 띄어 카탈로그 모델 일을 시작했고 1921년 해당 백화점에서 후원하는 단편 광고 영화에도 나왔는데, 이는 더 많은 단편 홍보 영상 일거리로 이어졌고, 코미디 감독인 에릭 페츨러의 단편 영화 <Luffar-Petter(부랑자 피터)>(1922)에도 출연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영화관에 매료돼있던 가르보는 스톡홀름의 왕립 연극 학교에서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했다.
가르보는 감독 모리츠 스틸러[3]의 눈에 들어 그가 연출한 로맨스 영화 <괴스타 베르링스 사가(Gösta Berlings Saga)>(1924)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스틸러가 매니저를 자처한 덕에 경력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예명을 가르보로 바꿔준 것도 이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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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르보는 자국에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주연작 <기쁨없는 골목길(Die freudlose Gasse)>(1925)은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해 여름 스틸러와 가르보는 MGM과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진출한다. MGM은 가르보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머리와 눈썹을 정성껏 다듬었다. 치아 교정을 시키고 15kg을 빼라고 강요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MGM은 가르보와 스틸러 두 사람 모두에 대해 그닥 확신을 갖지 못했고, 남미 통속 소설[4]을 원작으로 하는 <Torrent>(1926)에 가르보를 요부로 캐스팅하면서 스틸러 대신 다른 감독을 꽂았다. 가르보는 대본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국 데뷔작을 스틸러가 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다. 이 작품이 흥행하고 나서야 MGM은 또 한 번 남미+가르보 히트 공식을 써먹기 위해 소위 남미 연인[5]의 대명사였던 안토니오 모레노[6]를 상대역으로 꽂으면서 가르보의 이름을 포스터 최상단에 배치시키고 스틸러를 감독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스틸러는 스튜디오와 의견 대립을 하면서 <The Temptress>(1926)에서 쫓겨났고 촬영 도중 언니가 스웨덴에서 사망해 가르보에겐 개인적으로 또 한 번 매우 불행한 작품이 되었다. 심지어 MGM은 스웨덴에서 열린 언니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막아버렸다.
그러나 미국에서 찍게 된 세 번째 작품 <Flesh and the Devil>(1927)은 사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가르보는 당대 가장 인기 있던 무성영화 남자배우인 상대역 존 길버트[7]와 첫눈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주로 혼외 관계를 하는 여성이나 숙명적 사랑을 하는 연인 역을 도맡으며 무성영화의 여신으로 군림하던 가르보가 출연한 최초의 유성영화는 <안나 크리스티>였다. 이 영화 광고할 때 내건 표어는 "Garbo Talks!(가르보가 말한다!)."[11] 20년대 무성영화가 토키로 넘어갈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배우들 중 한 명이다. 기존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목소리나 부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많은 인기 배우들이 결국 한계에 부딪혀 반강제로 은퇴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가르보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는 가르보가 무성영화로 쌓아올렸던 인상과 잘 어울렸다. <안나 크리스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되었고, <마타 하리>, <그랜드 호텔>, <안나 카레니나>, <춘희>, <니노치카> 등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편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는 유성영화로의 변환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MGM 윗사람들과의 불화마저 심각해져 스튜디오를 떠난 뒤 경력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는데, 가르보가 자신이 주연인 <크리스티나 여왕>에 길버트를 쓰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해 MGM으로 다시 데려와 재계약을 맺게 했다. 그러나 해당 영화가 작품성으로나 흥행으로나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길버트의 심신은 계속 망가졌고, 1936년 길버트가 심장마비로 요절하면서 둘의 공동 작업은 완전히 끝이 났다.
마리 퀴리를 맡아 정극 연기에 도전하려고 했지만 MGM이 제작을 미루고[12] <두 얼굴의 연인>(1941)을 억지로 맡겨 크게 실망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가르보는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36세 때였다. 가르보는 할리우드와 연기생활 모두에 질려있었고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대중의 관심과 명성도 싫고 무서웠다. 그나마 이게 30대 초반에 이미 그만 두고 싶었던 것을 억지로 참고 참다 터트린 거였다. 그렇게 가르보는 최정상에서 군림하던 30대에 은퇴를 선언하고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동성애자였다는 의심이 꾸준히 있어왔다. 실제로 보면 여성이라기보단 중성, 이를 넘어 남성에 가까운 느낌까지도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친구인 작가 고어 비달은 "여자들은 가르보를 좋아했지만, 남자들은 가르보를 다 싫어했다"고 답했다.[19] 다른 사람들의 말까지 종합해보면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는 건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사실로 보이며 이런 점이 동성애자 의혹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남성 연인들이 존재했던 게 분명하기 때문에 여성 연인들의 존재 여부가 확실해진다면[20] 양성애자로 분류하는 게 합당하다.
명성에 비해 연애적으로 흥미를 보이는 남성들이 적었기 때문인지 마음에 드는 남성들에겐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해 직설로 구애하는 편이었다. 활동 당시엔 이게 거꾸로 유혹에 능한 악녀 이미지가 되어, 세간에선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가 가르보의 농간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진실로 여겨졌다.[21] 감독 모리츠 스틸러도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MGM의 희생양이었지만 "희대의 악녀" 가르보 때문에 자살했다는 악성 소문이 수십 년 동안 기정사실화 됐었다.
가장 유명한 연인인 존 길버트와는 이들 콤비의 첫 영화 촬영 때인 1926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교제했다. 길버트는 여러 번 청혼했으며, 감독 킹 비더가 엘러노어 보드먼[22]과 결혼할 때 합동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걸 끔찍하게 여긴[23] 가르보가 결국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서신 등을 보면 가르보는 이즈음 이미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길버트는 아이너 클레어[24], 버지니어 브루스[25]와 결혼생활을 했다. 길버트가 이 와중에도 다시 가르보와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헤어진 후에도 혹은 헤어진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도 가르보는 길버트에게 강한 애착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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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왕립 연극 학교를 다녔으며 평생 교류한 스웨덴 배우 미미 폴락[45]에게 일방향의 연애 감정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결혼을 한 폴락이 남편의 아이를 출산을 했을 때 가르보가 "아버지가 된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표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동성애 성향의 근거로 제시되는 편지 구절들은 표현이 상당히 모호하나 두 사람의 서신이 전부 공개된 상황이 아니라 가르보가 폴락을 짝사랑 했다는 이론이 여전히 지지 받고 있다.